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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리모트 근무 후기: 아이와 함께한 한 달, 솔직한 기록

·7 분
작성자
nanta
Apache Kafka, Airflow, Trino, StarRocks 등 데이터 엔지니어링과 모던 데이터 인프라에 대한 실무 경험을 공유하는 블로그입니다.

발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서핑, 열대 자연,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노트북을 펼친 디지털 노마드. 워케이션(workation)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이다.

나도 그 이미지에 이끌렸다. 아이에게는 해외 유치원이라는 새 경험을 주고 가족에게는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2023년 초, 회사의 해외 리모트 근무 제도를 활용해 발리에서 약 한 달간 일하고 생활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이가 있는 가정에게 발리 리모트 근무는 생각보다 별로였다. 이 글은 그 솔직한 기록이다. 발리 리모트 근무를 고민하는 분들, 특히 어린 아이가 있는 가정이라면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출발 전: 준비해야 할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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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과 세무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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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리모트 근무는 비행기표 사기 전에 회사 승인부터 받아야 한다. 승인 과정에서 일정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3개월 체류를 신청했는데 세무 검토 과정에서 세법상 2개월 이하만 가능하다는 회신을 받았다. 해외 체류 기간에 따라 세금 처리가 달라져서다. 비행기표를 이미 끊어놨다면 변경 수수료를 물어야 할 뻔했다. 반드시 승인 확정 후에 항공권을 구매하자.

항공권은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썼는데 비용 대비 차감되는 마일리지가 적어서 가성비가 좋았다.

숙소. 빌라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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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숙소는 크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호텔이나 리조트를 전전하거나, 월 단위로 빌라를 빌리거나.

호텔에서 3일 정도 지내본 뒤 수영장이 딸린 발리스러운 빌라를 월 단위로 계약했다. 사진으로 보면 정말 근사하다. 야자수 아래 프라이빗 풀, 넓은 거실, 열대 정원. 실제로 살아보면 다르다. 결국 빌라를 취소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빌라의 현실.

  • 벌레가 많다. 개미와 모기는 기본이고 이름 모를 벌레가 출몰한다. 호텔이나 리조트는 방역을 하지만 빌라는 그렇지 않다.
  • 침구류와 청소 상태가 들쭉날쭉하다. 관리 수준이 숙소마다 천차만별이다.
  • 상수도 문제.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게 가장 큰 문제다.
  • 교통이 불편하다. 빌라가 저렴한 이유가 있다. 대부분 도심에서 떨어져 있고 발리에서 걸어다니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 달 이상 체류한다면 빌라가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특히 아이가 있다면 호텔이나 서비스드 레지던스가 낫다. 관리와 위생, 편의성 모든 면에서.


위생. 발리의 가장 큰 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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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여행 커뮤니티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토픽이 있다. “병원 어디 가야 해요?”, “약 좀 주세요”, “샤워기 필터 구합니다.”

과장이 아니다.

물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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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는 지하수를 끌어다 쓰는 곳이 많다. 오염된 경우가 적지 않아서 비누로 빡빡 씻어도 몸이 계속 미끈미끈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유럽의 석회수와는 또 다른 종류의 불쾌함이다.

수영장은 발리 곳곳에 널려 있지만 소독약 냄새가 안 나는 곳이 많다. 소독약 냄새가 안 난다는 건 소독을 안 한다는 뜻이다. 세균과 박테리아가 번식하기 좋은 열대 기후에서.

비치도 안심할 수 없다. 서핑 중 육지에서 흘러들어온 오염된 바닷물을 삼키고 아픈 사람이 많다. 카페에서 나오는 차가운 음료의 얼음이 정수된 물로 만든건지도 확신할 수 없다.

아이의 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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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전 나름 준비를 했다. 장티푸스 예방접종을 맞고 출국 전날 종합병원에서 피검사로 염증 수치와 백혈구 수치를 확인했다. 유산균도 2주 전부터 복용시켰다.

도착 3일 만에 아이에게 고열이 찾아왔다.

평소 38도 위로 올라간 적이 없던 아이가 39.5도까지 치솟았다. 응급실을 세 번 갔다. 세 번째 응급실에서는 귀가하겠다고 하니 “책임지지 않겠다"는 서명을 하고 가라고 했다. 결국 병동에 입원. 4일간 입원했다.

이때 경험은 지금 돌이켜봐도 힘들다.

  • 기본적으로 낙후된 인도네시아 의료 시설에 대한 불신. 말이 잘 통하지도 않는다.
  • 아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비가 쏟아지면서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굉음과 함께 천장 조명이 떨어지고 놀라서 아이를 안고 뛰쳐나온 직후 천장이 내려앉았다. 그 지역에서 제일 좋다는 병원에서 벌어진 일이다.
  • 응급실 한 번 방문에 검사비 포함 약 50만 원. 총 의료비 300만 원 이상.

여행자 보험 가입은 꼭 해야 한다. 보장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고 의료비 보장 한도가 넉넉한 상품으로 들어야 한다. 솔직히 이 경험 이후 “뭘 위해 여기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이와의 일상. 기대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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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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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아이와 하는 일상을 떠올려 보자. 책 읽어주기, 산책, 놀이터, 키즈카페, 장난감 놀이, 주말 캠핑. 발리에서는 이것 중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책이 없다. 한글 동화책을 한 보따리 가져가지 않는 한 읽어줄 책이 없다.
  • 산책이 안 된다. 발리에는 인도(보도)가 거의 없다. “3발자국 이상 걸으려면 오토바이를 불러야 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강렬한 햇빛 아래 매연을 맞으며 걷다보면 오토바이에 발이 깔릴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아이와 산책은 상상도 못 한다.
  • 놀이터가 거의 없다. 한국처럼 아파트 단지마다 놀이터가 있는 환경이 아니다. 법적으로도 의무 시설이 아닌 듯하다. 아주 가끔 하나씩 보이는데 시설 수준이 한국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 실내 놀이 환경이 없다. 집에는 익숙한 장난감이 있지만 여기에는 없다.

결국 한국에서는 안 보여줬던 유튜브를 보여주게 된다. 이게 현실이다.

기대했던 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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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 호주 교민이 많다 보니 영어 기반 유치원이 잘 되어 있다. 아이에게 영어 환경을 경험시켜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컸다.

근데 아이 성향을 간과했다. 우리 아이는 소극적이고 먼저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다. 원생 대부분이 영어를 쓰는 환경에서 2주 동안 혼자 노는 아이를 지켜봐야 했다. 결국 유치원을 그만 보내기로 했다. 기대가 컸던만큼 실망도 컸다.

아이 성향에 따라 경험이 완전히 달라진다. 사교적이고 적응이 빠른 아이라면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아이가 그렇지는 않다. 아이 성격을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나의 일상. Vacation이 아니라 Worka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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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던 시간이 생겨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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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일상을 돌아보자. 부지런한 성격은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 밥 먹이고 유치원 보내고 일하다가 퇴근하면 아이와 놀아주고 아이가 잠들면 짧으면 한 시간 길면 두 시간의 자유 시간. 유튜브 보거나 밀린 일 하거나 운동하거나.

발리라고 해서 없던 시간이 생기지 않는다. 하루에 내 시간이 한 시간인 사람이 장소를 옮겼다고 갑자기 세 시간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출퇴근 시간이 늘었다.

인터넷. VPN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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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일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인터넷 속도가 느리고 정전이 잦고 수시로 끊긴다.

코워킹 스페이스는 다르다. 괜찮은 코워킹 스페이스는 UPS와 자체 발전기를 갖추고 있고 여러 ISP와 계약해서 한쪽이 끊겨도 다른 회선으로 유지된다. 회사에서 제시한 최저 인터넷 속도를 대부분 만족한다.

문제는 VPN이다. 회사 보안 정책상 VPN을 켜고 일해야 하는데 VPN을 켜는 순간 인터넷 속도가 원래의 10~20% 수준으로 떨어진다. VPN을 켜도 원활하게 일할 수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는 발리 전체에 몇 개 안 된다. 그런 곳은 하루 이용료가 2만 원 정도로 비싸고 숙소에서 가깝지도 않다.

저녁 시간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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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밤 시간. 서핑이나 야외 액티비티는 불가능한 시간이다. 유럽처럼 거리에서 뮤지션이 공연하는 문화도 아니다.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건 괜찮은 음식점이나 바에서 맛있는 걸 먹고 술 한 잔 하는 정도.

근데 이것도 녹록지 않다.

  • 술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다. 이슬람 국가라는 배경 때문인지 크래프트 비어는 로컬 브루어리 2~3곳이 전부이고 해외 크래프트 비어는 아예 없다. 증류주는 비싸고 와인은 수입산이라 종류가 한정적이고 가격이 높다.
  • 괜찮은 곳은 한국만큼 비싸다. 음료를 따로 시키고 세금이 15~20% 붙는다. 매일 괜찮은 곳에서 먹기엔 통장 잔고가 부담스럽다.
  • 저렴한 곳에서 먹다보면 남의 나라까지 와서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싶다.

도착 2주 만에 통장 잔고가 급격히 줄어드는 걸 목격했다.


그래도 좋았던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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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이야기만 한 것 같아서 좋았던것도 솔직하게 적는다.

코워킹 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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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의 코워킹 스페이스 문화는 확실히 눈에 띄었다. PC방 같기도 하고 도서관 같기도 하고 카페 같기도 한 공간. 여기는 이런 분위기구나, 저기는 이런 메뉴가 맛있네 하면서 코워킹 스페이스를 구경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전 세계에서 온 디지털 노마드와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비치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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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는 수영장, 앞에는 바다. 음악과 맛있는 음식. 발리의 비치클럽은 확실히 특별한 경험이다. 젊은 사람이 즐기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활력이 됐다.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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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비로소 내가 발리에 놀러 온 것 같았다. 투어도 하고 비치클럽도 가고 서핑도 한다. 평일에는 느낄 수 없었던 발리의 매력이 주말에 몰아서 찾아온다. 역설적이지만 이게 “워케이션"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이었다. work과 vacation이 동시에 오는 게 아니라 번갈아 오는 것이다.


정리. 발리 리모트 근무, 누구에게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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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간의 경험을 정리하면 발리 리모트 근무의 만족도는 생활 방식에 따라 크게 갈린다.

조건만족도이유
미혼 or 커플 (아이 없음)높음액티비티, 자유 시간, 유연한 일정
아이가 있는 가정낮음위생 리스크, 할것 없음, 시간 부족
VPN 불필요한 업무높음코워킹 스페이스 활용이 자유로움
VPN 필수 업무보통코워킹 스페이스 선택지 제한
넉넉한 예산높음좋은 숙소 + 좋은 음식 = 좋은 경험
빠듯한 예산낮음저렴한 곳 전전하다 지침

가기 전에 체크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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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있는 가정이 그래도 가겠다면.

  • 여행자 보험. 의료비 보장 한도를 반드시 확인. 응급실 한 번에 50만 원이 나올 수 있다.
  • 장티푸스 예방접종. 출국 최소 2주 전에 접종.
  • 숙소. 빌라보다 호텔이나 서비스드 레지던스. 위생과 관리가 다르다.
  • VPN 테스트. 회사 VPN을 켠 상태에서 일할 수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를 미리 조사.
  • 아이 준비물. 한글 책, 장난감, 태블릿에 오프라인 콘텐츠 다운로드.
  • 유치원. 아이 성향을 냉정하게 판단. 소극적인 아이에게 영어 유치원은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 예산. 한국 생활비 + 30~50% 여유를 잡아야 한다. 발리가 저렴하다는 건 로컬 음식과 로컬 숙소 기준이다. 한국인이 만족할 수준으로 생활하려면 한국과 비슷하거나 더 들 수 있다.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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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 생각해보면 발리 리모트 근무에서 가장 크게 느낀 건 하나다.

장소를 바꾼다고 삶이 바뀌지 않는다. 하루에 자유 시간이 한 시간인 사람은 발리에서도 한 시간이다. 아이를 돌봐야 하는 부모는 발리에서도 아이를 돌봐야 한다. 거기에 위생 리스크와 의료 불안, 인프라 불편까지 얹어진다.

그럼에도 이 경험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해보지 않았으면 계속 궁금했을 것이고 발리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살았을 것이다. 환상을 현실로 확인한 것 자체가 가치 있었다.

다만 같은 조건으로 다시 해외 리모트 근무를 한다면 발리는 아닐 것이다. 의료 인프라가 탄탄하고 아이와 산책할 수 있는 도시. 보도가 있고 놀이터가 있고 수돗물을 믿을 수 있는 곳. 일상의 기본이 갖춰진 도시에서의 워케이션이 진짜 워케이션이다.